우리 아이들은 왜 허수아비가 되었을까

성남 교회, 용인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KAIST에 방문했다. 이 여행의 컨셉은 “비전 투어”라고 한다. KAIST 구석구석을 다니며 상세히 설명해주시기를 원하셨다. 예상대로 중고등부 학생들을 인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쉽게 반응하지 않으며 아웃사이더가 되려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세 학생은 그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틈만 나면 무리에서 이탈하고 차 안에서 “쉬려고”했다. KAIST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자기들의 관심을 결코 끌지 못하리라 처음부터 확신한 것일까? 그래서 저 사람이 무엇을 보여줄지, 무슨 설명을 해줄지 들어보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것일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에 관심이 있단 것일까? 아니, 관심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즐겨 보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프로그램에는 문제가 있는 어린이들을 올바로 교정해주는 과정이 나온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근원은 부모의 밀어붙이기 식 태도이다. 자녀가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고 더 밀어붙인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이유 없이”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자기를 공격하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이유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참고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유”를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의 편이란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탈 행동은 무언가에 대한 반작용이다. 어린이들과 똑같은 원리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무리에 소속돼라는 강요에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너도 이 아이들처럼 공부 좀 해라.” “너도 이 아이들처럼 책 좀 읽어라.” “너도 이 아이들처럼 설명 좀 열심히 들어라.” 이런 식으로 어른들은 “소속”을 강요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늘 느낀 점에 대해서 한마디씩 말해보라고 했더니 학생들은 정말로 한마디씩 말했다. 16명의 학생들에겐 총 3가지의 느낀 점이 있었다. “KAIST에 오고 싶다.” “좋은 곳인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다.”

난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얼마나 하면서 사는지 궁금하다. 최악의 경우는 KAIST를 반나절 둘러보면서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없는 것이다. 것보다 조금 덜 나쁜 경우는 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다. 것보다도 조금 덜 나쁜 경우는 표현할 줄도 알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세 가지 모두 나쁘다.

중고등학생들이 자기 의지를 사용하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 학교에서 억지로 공부하고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가야하고.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피터지게 공부해야 하고 안 하면 부모에게 잔소리 들어야 하고. 아니면 부모는 자기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든지. 매일 자신이 구지 힘들여 계획하지 않아도 24시간을 “알뜰하게” 소비할 수 있는 현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는지 모른다. 그 누구도 내가 컴퓨터 게임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공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주지도 않는다. 관심이 없다면 의지도 없다. 의지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리고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관심사도 취미도 없다. 결국 이 둘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악순환을 이룬다. 자동차 만드는 과정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물을 주지 않으면 자동으로 기울어지는 화분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심지어 저걸 어따 쓰냐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는 그냥 마비되어 있다.

난 부모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의 자녀가 오늘밤 집에 들어오면 오늘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라고.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면 오늘 어떠어떠한 생각을 했었는지 물어보라고.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던 것에 대해 함께 10분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살펴보라고.

내가 오늘 관심있었던 것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이 cool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만난 아이들이 떠오른다. 걔네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또 생각을 발전시켜 나간다. 자기가 말한 것에 자기가 너무 압도되면 칠판에 적는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자신의 관심사와 생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오버”라고 생각할까? 난 그것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상대방은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질투를 느끼고 그릇된 방식으로 자기 위안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저 사람은 오늘 다양한 탱크 모형들을 보고 가슴이 벅차한다. 나는 변변한 취미 하나 없다. 쳇, 왠지 저 녀석은 잘난 척을 하는 것 같다. 듣기 싫다.’ 상대로부터 긍정적인 자극을 받지 않고 상대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질투이다. 또 나도 나만의 특기와 관심사를 가져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잘난척으로 치부하고 듣기 싫다고 귀를 막기 때문에 이는 그릇된 자기 위안이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고 무조건 쉬운 방법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위해 한마디 해달라는 형제님의 부탁에 책을 많이 읽고 취미생활을 가지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돌이키면서 가장 후회하는 점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KAIST에 오기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그래도 내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슬프다.

이번 여행에 함께하는 한 초등학교 어린이를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된다. 도서관에서 비행기 잡지를 발견하고는 매우 좋아했던 아이. 그래, 역시 문제는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방식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느껴진달까…

우리 아이들은 왜 허수아비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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