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눈높이 맞추기

예성이 귀 수술 때문에 삼성서울병원에 문병 갔다. 가는 길에 무엇을 사들고 갈까 고민을 하는데 마땅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의 눈높이에 맞춰서 생각해보자…..” 케익은 너무 진부하고 로봇을 사가져가면 좋을 것 같은데 무슨 로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결국 색연필과 파스텔, 스케치북을 사들고 갔다. 엄마께서는 뭘 그런 걸 샀냐고, 아이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하셨다. 흠.. 그런가…ㅠㅠ 그래도 더 좋은 건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이었을 때엔 “어떻게 어른들은 이렇게 우리 눈높이를 못 맞출까… 이런 농담은 우리들한텐 재미 없는데…” 하고 항상 생각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수업을 할 때엔 “에휴. 이걸 저렇게 설명하면 애들이 못 알아듣지. 이건 이렇게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고, 혹시나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아이들 수준에 맞추지 못하는 선생님들처럼 될까봐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한테 자주 물어보는 수학 문제 같은 것들은 “잘 설명하는” 방법을 어른이 되면 잊어버릴까봐 적어놓을 생각까지 했다.
어쨌든 우려하던 대로 난 아이들의 눈높이에 잘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예성이는 선물을 보고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병실에 TV도 없길래 “너무 심심하겠다?” 물었더니 노트북으로 영화를 본다고 한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집에 만화 영화 DVD도 많은데… 예성이와 뭔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 시도를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정말 어른 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이고 예성이를 별로 즐겁게 하지 못하는 대화인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기껏해야 TV도 못 보고 너무 심심하지 않느냐, 아프지 않느냐 하는 것들이고 막상 예성이는 집하고 병원이 너무 멀어 학교 친구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을 가장 아쉬워 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은 참 복잡한 것이다. 한 편으로 과거의 자신을 점점 잃어 가는 것이다. 오늘은 그냥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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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눈높이 맞추기

Conversation with Sis. Yang

어제 아침에 연구실에 갔다가 기분이 상해서 주말에 서울에 오기로 결심을 했다. 가뜩이나 요즘 연구는 연구대로 진로는 진로대로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은데 급 우울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나 공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겠고 의욕도 없어졌다. 형신이한테 나를 motivate 할 수 있는 말을 준비해놓으라고 말하고선 밤 늦게 형신이 집으로 직행했다. 형신이는 할 일이 많았는지 방에서 자기 할 일 하다가 자버렸고, 난 새벽 3시까지 양 자매님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내 고민은 이 분야의 연구라는 길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굉장한 업적을 남기지 않는 한 아둥바둥 열심히 연구를 해봤자 그 공헌도가 매우 미비할 것이며, 사람들은 왜 저런 쓸데없는 것들을 할까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연구 자체를 너무 좋아해서 미치지 않는 이상 이것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에, 그래도 학생이기 때문에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면서 노력해야하는 내 모습이 안타깝달까… 현재 전혀 다른 방향의 진로도 생각은 하고 있지만 확실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일단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꾸준히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단, 문제는 요즘 의욕도 부족하고 뭔가 모티베이션을 가지고 싶었다.

자매님께선 먼저 나를 격려해주셨다. 세상에는 너희처럼 하고 싶어도 능력이 못 따라주는 사람이 많은데, 일단 너희는 능력을 받았으니 어떻게든 하긴 하면 이루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자매님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셨다. “훌륭한 문학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연세대학교 아니면 다른 곳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러기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에서 일을 해야했다. 몇 년 그렇게 일을 하다가 다시 공부할 생각을 하려고 보니 자신이 참 별볼일 없는 존재더라. 고향에서는 자기가 매우 잘난 줄 알았는데 서울에 와보니 우물 안 개구리였더라. 차라리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학을 일단 들어갔더라면 그런 무기력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그냥 이 말이 격려가 되었다. 대학원 2년이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이 기간을 놓치면 잃게 되는 것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가능성이 희박한 길을 가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만 하면 또 그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는 있을 테니까.

자매님은 항상 열심히 생각하고 의미를 찾아야만 실행에 옮기는 타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을 열심히 하면 점점 각도가 벌어지다가 결국에는 360도를 다 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이 과정은 헛된 과정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체험한 주님의 말씀이 남아있게 된다고 하셨다. 즉, 똑같이 원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사람과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돌아온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나선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위에서 보면 계속 똑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바퀴를 돌면 이전에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믿음의 문을 열면 목적지까지 곧게 난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걷다 보면 또 다시 새로운 문이 나오고 이 문을 열고 길을 걷다보면 또 문이 나오고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주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 항상 주님이 계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주님이 계시게 해야한다. 교회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왜 주님이 집회 장소에만 있도록 제한시키는가? 주님이 연구실에 계시면 안 되는가?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 계시도록 하면 안 되는가? 일상과 교회 생활이 명확히 분리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말씀이 나를 비추었다. 나는 주님이 내 일상적인 생활(연구, 공부 등등)에 개입하시도록 얼마나 허락해드리는가? 절대로 건들지 못하도록 나를 꽉 닫아 놓지는 않는가? 공부랑 주님을 얻는 생활은 시간이라는 한정된 리소스를 다투는 직렬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서로 독립적인 병렬 관계에 있다. 그것이 믿음이고 내가 여름 방학 때 배운 공과이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내 능력의 한계에 갇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방식은 내 한계 위에 쏟아부어주시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먼저 그 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추구하면 그 앞에서 말한 것들–무엇을 입을까 먹을까하는 삶의 문제들–은 주님이 알아서 더해주신다.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무미건조하게 넘기던 말씀이지만, 실제 이는 인생을 사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는 어마어마한 약속이다.

역시 사람은 말을 해야 살 수 있다. 그동안 대전에서 이런 오픈된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번 계기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힘을 조금 얻었다.

Conversation with Sis. Yang

Romans 3

유대인

유대인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주님께서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실 것입니다.”(시 51:4) 따라서 유대인 중 몇몇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진실성이 흘러 넘치면 잘 된 건데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음. 이 사람은 심판을 받아 마땅함.

헬라인

그렇다고 헬라인이 더 낫지도 않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 빗나가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시 14:1-3)

율법 vs. 은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운 육체가 없고 죄를 분명히 알 뿐이기 때문에,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 모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구약 (율법) vs. 신약 (은혜)

그리스도 예수님은 화해장소이다. 화해장소란 원래 이전에 사람들이 지은 죄를 “잠시 덮어두고 지나쳐 가심으로” 오래 참으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이때에는 그분의 의를 나타내셔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의롭다 하신다. 죄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양을 잡아 피를 뿌려야했다. 이는 사람의 죄를 덮어두는 의미를 가졌다. 구약 시대의 양은 예수님의 예표였지만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잠시 덮어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참된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실제로 “죄를 없애실” 수 있다. 믿음으로 양을 잡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 살 수 있었던 구약처럼, 오늘날엔 예수님이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구약에는 율법이 주어져서 이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 의롭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신약에 와서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 모두에게 미치는 의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서신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은 쓸모가 없고 오직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Romans 3

National Geographic Shop

On the way back to the hostel with a little disappointment at Sentosa Island, I found National Geographic shop at HarbourFront MRT Station. It was bigger joy to see travel items, gorgeous photos, and antique furniture. I wished to collect all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s. The shop was also selling high-quality pictures, but I didn’t photograph them for copyright’s sake.

National Geographic Shop

“열정”의 재조명

‘열정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곱씹으면서 우리 사회는 ‘열정’이란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궁금해졌다. 하루 종일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 대학생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열정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학생이란 무릇 자신의 꿈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분투한다는 게 사회 통념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열정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는 것은 그 속에 큰 오류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 사람이 열정적인 사람인가” 대신 “이 사람이 ‘무엇’에 열정적인 사람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대학생은 ‘드라마’에 열정적인 대학생일지 모른다. 그럼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는 열정적인가?” 다시 말해, “아무 것에도 열정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은 교육자들이 던져야 할 질문일 것이다. 허나 그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사람이 그 어떤 것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며(심지어 그것이 도박일지라도), 이는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열정이 있긴 한데 옳지 못한 데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역시 교육의 문제다. 어쨌든 이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고 단지 대상이 잘못 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는 꽤 무책임한 말이라는 느낌도 든다. 우리 사회는 열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아이는 드라마에 열정적이에요”라고 말하는 부모는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열정이 없는” 아이를 나무란다. 아이가 열정이 없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차라리 부모 자신이 원하는 것에 열정을 갖도록 만들어주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게 합리적이다. 전자는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후자는 부모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열정, 좋은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원동력이 되어주니까. 열정을 바른 곳에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열정”의 재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