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자작극이다

기억은 언제나 자작극이다.

그녀의 기억과 일부 겹치기는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의 슬픈 이야기는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실에 대한 ‘해석과 편집’이 실제 내가 기억하는 내용이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의미는 해석과 편집의 결과다. 실제 일어났던 사실과는 그리 큰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일부의 사실을 근거로 만들어낸 내 ‘의미부여’다.

그래서 옛 연인을 만나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해석과 편집으로 인한 왜곡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어릴 적 반나절을 걸어다녔던 초등학교까지의 그 먼 길이 불과 몇 킬로미터에 불과하단 것을 확인했을 때의 허전함과 같다.
그렇다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지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또 아니다. 원치 않는 일이 자꾸 기억나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만 자꾸 보이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자극들 중, 우울한 자극들만 극대화해서 받아들인다. 우울한 자극들에 습관이 되면, 그 우울한 자극들이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인터넷에 자신을 둘러싼 온갖 허접한 욕설들에 절망해 자살한 여배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은 “그까짓 것 보지 않으면 되지.” 하겠지만, 당사자들은 그게 아니다. 자꾸 그것들만 보인다. 그것들이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그래서 이젠 아예 그것들을 찾아서 보려고 한다. 그 우울한 자극들을 보며 괴로워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보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걷는 것이 제일 좋다. 집이나 사무실을 나와 걷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시각, 후각, 청각의 자극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깊이 박혀 있는 대못 같은 기억들을 억압하려 해선 절대 안 된다. 다른 사소하고 다양한 자극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보면, 그 대못은 대못대로 다양한 자극들의 일부가 되어 작아진다.

– 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기억은 자작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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