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

삶이 재미없는 한국 남자들에게 나타난 세 번째 병적 현상은 ‘폭탄주’다. 이건 정말이지 심각하다. 마라톤은 그 자체로 해결책은 될 수 없으나, 그래도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마라톤에 비해 폭탄주는 아주 악질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온다. 하지만 폭탄주는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아주 심각한 퇴행적 현상이다.

…왜 폭탄주를 마시느냐고 물었다. 빨리 취한다고 했다. 나는 또 물었다.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느냐?”

맨정신으로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이야기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 취하려고 폭탄주를 돌린다고 했다. 폭탄주가 몇 잔 돌아가고 눈이 흐릿해지면 그제야 비로소 맘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런! 취한 후에 서로 ‘한 이야기 하고 또 하는 것’을 두고 아무도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지 않는다. ‘취해 주정부린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정신병리학에서는 ‘자폐증’이라고 한다. 폭탄주는 집단 자폐증상이다. 자폐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아동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자폐현상은 나타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구체적 신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세계가 타인과 공유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경우도 약한 정도의 자폐증상이라 할 수 있다.

– 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폭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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